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겐리흐 야고다 (문단 편집) == 일생 == 그는 리빈스크라는 도시에서 시계 제작자이던 [[유대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으며, [[10월 혁명]] 이후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 아래에서 2대 부부장이 되었고, 제르진스키 사후에는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아래에서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멘진스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야고다는 [[1920년]]대부터 [[NKVD]]를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1931년]] 제 2위원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934년]] [[7월 10일]]. 멘진스키가 죽은 뒤 2달만에 [[NKVD]]의 위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 야고다의 최대 만행이자 업적(?)은 바로 소련의 강제수용소인 [[굴라크]]의 설립과 운영이다. 또한 수감자들을 강제 동원해 발트해-바렌츠해 운하를 파는 등 온갖 사업을 전두지휘했다.[* 다만 이 운하사업은 [[니콜라이 예조프]]의 '업적'이 더 많다. 훗날 예조프가 숙청될 때에도 마지막까지 유지했던 자리가 '수운인민위원장'인데, 운하 건설자에 맞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후 [[대숙청]] 때 야고다도 최후를 맞이하는데, 이 대숙청의 도화선이 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키로프 암살설은 스탈린이 지시했다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근래의 정설이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흘레브뉴크에 따르면 키로프 암살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목록 조작해 조사를 한 건 바로 [[니콜라이 예조프]]이다. 그는 후에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등이 기소된 첫번째 공개 재판을 수행했다. 하지만 중앙당은 이 때부터 야고다를 불신했다. [[1932년]]부터 눈치 까고 있던 이들 블록을 수사하고 재판하는 게 너무 더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이 "야고다 동무는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지노비예프 패당을 수색하기엔 능력이 모자란다"라고 말한 뒤 해임당하고, 예조프에게 밀려 NKVD 위원장에서도 밀려났다. [[1937년]] 3월, [[NKVD]]에서 밀려난 뒤 우편통신부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유는 그가 이전의 각본 재판에서 '피고인들의 죄는 단지 스탈린의 적이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고, 8년 전에도 [[니콜라이 부하린]]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스탈린에게 밉보인 적이 있던 탓이었다. [[1938년]] 3월에 야고다는 21명의 재판이라 불리는 각본 재판에서 [[나치 독일|독일]]의 첩자로 국가에 대한 반역 및 음모행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직후 바로 처형되었다. 당시 [[예조프]]는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처형 직전 옷을 모두 벗긴 알몸 상태로 만들어 그의 고환을 고문했다고 한다. 야고다는 죽으면서 자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할 때 언젠가는 당신도 비슷한 꼴을 당할 거라는 경고를 수도 없이 받았는데 그걸 무시했다가 결국 똑같은 꼴이 됐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리고 예조프에게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말대로 예조프는 2년만에 결국 같은 꼴이 되었다. 숙청 당시 그의 죄목 중에는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멘진스키]]와 [[막심 고리키|고리키]]를 독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만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이었으니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 훗날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가 집권한 뒤 스탈린 집권기의 피해자들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야고다에 대한 복권도 언급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논의 끝에 야고다는 복권하지 않기로 결정되었고, 1988년과 2015년에 두 번이나 심의를 더 거쳤지만 역시 복권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대체적으로 수렴된 의견은 '사법살인을 저지르다 자신도 그 피해자가 된 야고다는 복권할 수 없다'였다. 다만 이 의견을 낸 사람들도 야고다의 사형 판결에서 그에게 씌워진 혐의 자체는 거짓이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후대의 인물인 예조프와 베리야와는 다르게 야고다에 대한 조사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91년생인 야고다는 1907년부터 볼셰비키의 일원이었고 [[펠릭스 제르진스키|제르진스키]]가 직접 발탁한 [[체카]]의 엘리트이자 1920년부터 체카 상무회의 일원, 1923년부터 체카의 3인자였다. 레닌시절부터 고위직에 있던지라 소련 정치권 입장에서는 야고다에 대한 복권과 전면적 재조사를 하는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 참고문헌 : [[http://ko.wikipedia.org/wiki/겐리흐_야고다|위키백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